최악의 하루, 손실은 얼마? 금융기관의 위험 나침반 VaR

최악의 하루, 손실은 얼마? 금융기관의 위험 나침반 VaR

최악의 하루, 손실은 얼마? 금융기관의 위험 나침반 VaR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 봅니다. 당장 내 주식 계좌가 내일 반 토막 나면 어떡하지? 와 같은 개인적인 걱정부터 시작해서 말이죠. 그런데 수조 원, 수십조 원의 돈을 굴리는 은행이나 증권사 같은 금융기관들은 어떨까요? 그들이 매일 마주하는 위험의 크기는 상상 이상입니다. 주가 폭락, 금리 급등, 환율 요동… 잠재적 손실 요인은 사방에 널려있죠.

이런 거대한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금융기관들은 나름의 ‘위험 측정 도구’를 사용합니다. 그중 가장 유명하고 널리 쓰이는 것이 바로 **VaR(Value at Risk)**입니다. VaR는 복잡한 위험 상황을 단 하나의 숫자로 요약하여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일정 기간 동안, 특정 확률 하에서 최대로 잃을 수 있는 돈이 얼마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고자 합니다. 오늘은 금융기관의 리스크 관리 핵심 도구인 VaR의 세계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그 작동 원리와 한계, 그리고 제 생각까지 솔직하게 털어놓겠습니다.

“얼마나 잃을 수 있을까?” 위험을 숫자로 요약하는 VaR (How Much Can We Lose? Summarizing Risk into a Number: VaR)

VaR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정상적인 시장 상황 하에서, 주어진 기간 동안, 주어진 신뢰수준 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대 예상 손실 금액입니다. 말이 좀 어렵죠? 쉬운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일기예보에서 “내일 기온이 영하 5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을 확률이 99%입니다”라고 한다면, 무슨 뜻일까요? 100번 중 99번은 영하 5도보다 따뜻하거나 같을 것이고, 단 1번 정도는 영하 5도보다 더 추울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VaR도 비슷합니다. 어떤 은행이 “1일 99% VaR가 100억 원이다”라고 발표했다면, 이는 “앞으로 하루 동안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이 100억 원을 넘지 않을 확률이 99%라고 예상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1%의 확률로는 손실이 100억 원을 초과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VaR를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최대 손실 금액: VaR 값 자체 (예: 100억 원)
  2. 보유 기간 (Time Horizon): 손실을 측정하는 기간 (예: 1일, 10일). 시장 리스크는 보통 1일이나 10일, 신용 리스크는 1년 단위를 사용합니다.
  3. 신뢰수준 (Confidence Level): 실제 손실이 VaR 금액을 넘지 않을 확률 (예: 95%, 99%). 신뢰수준을 높게 잡을수록 (예: 99.9%) 더 드물지만 큰 손실까지 포함하게 되므로 VaR 값은 커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VaR는 정해진 확률 범위 내에서의 최대 손실을 말할 뿐, 절대적인 최악의 시나리오(Worst-case scenario)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9% 신뢰수준의 VaR는 나머지 1%의 확률로 어떤 끔찍한 손실이 발생할지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미래 손실 예측하는 세 가지 수정구슬: VaR 계산법 (Three Crystal Balls for Predicting Future Loss: VaR Calculation Methods)

그렇다면 금융기관들은 미래의 손실 가능성을 어떻게 예측하여 VaR를 계산할까요? 마치 점쟁이가 수정구슬을 들여다보듯, 미래의 불확실한 손익 분포를 추정해야 합니다. 주로 사용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히스토리컬 시뮬레이션 (Historical Simulation): 가장 직관적인 방법입니다. “과거가 미래를 알려줄 것이다”라는 가정에 기반합니다.
    • 계산 방식: 특정 기간(예: 과거 250 거래일) 동안 내가 가진 포트폴리오의 일일 손익 데이터를 쭉 뽑습니다. 이 손익 데이터를 최악의 손실부터 최고의 이익 순으로 정렬합니다. 만약 99% 신뢰수준의 VaR를 구한다면, 손실이 가장 큰 쪽부터 1%에 해당하는 지점(250개 데이터 중 3번째로 큰 손실액)을 VaR로 결정합니다.
    • 장점: 계산이 비교적 간단하고, 수익률 분포에 대한 별도의 통계적 가정이 필요 없습니다. 과거 실제 데이터에 나타난 극단적인 사건(팻 테일)이나 비정상적 패턴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습니다.
    • 단점: 과거가 미래에도 반복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위기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입니다. 충분하고 관련성 높은 과거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2. 분산-공분산 방법 (Variance-Covariance / Parametric Method): 통계학의 힘을 빌리는 방법입니다.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이 **정규분포(Normal Distribution)**를 따른다고 가정합니다.
    • 계산 방식: 포트폴리오의 기대수익률(보통 단기에는 0으로 가정), 각 자산의 변동성(표준편차), 그리고 자산 간의 상관관계를 계산합니다. 정규분포의 통계적 특성을 이용하여, 주어진 신뢰수준(예: 99%)에 해당하는 손실 지점(평균으로부터 약 -2.33 표준편차 지점)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VaR를 구합니다.
    • 장점: 계산이 매우 빠르고 간단합니다. 필요한 파라미터(기대수익률, 표준편차, 상관계수)만 추정하면 됩니다.
    • 단점: ‘수익률은 정규분포를 따른다’는 가정이 현실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 금융 시장 수익률은 정규분포보다 극단적인 사건(팻 테일)이 훨씬 자주 발생합니다. 옵션과 같이 손익 구조가 비선형적인 상품의 위험을 제대로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방법의 단순성은 매력적이지만, 현실 왜곡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3.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 (Monte Carlo Simulation): 컴퓨터 파워를 이용해 수천, 수만 가지의 가상 미래 시나리오를 만들어보는 방법입니다.
    • 계산 방식: 포트폴리오에 영향을 미치는 시장 요인들(주가, 금리, 환율 등)이 미래에 어떻게 변동할지에 대한 수학적 모델을 만듭니다. 이 모델을 기반으로 컴퓨터를 이용해 무작위로 수많은(예: 1만 번) 가상 시나리오를 생성하고, 각 시나리오별 포트폴리오 손익을 계산합니다. 이렇게 얻어진 1만 개의 가상 손익 결과 분포에서 하위 1%(99% 신뢰수준)에 해당하는 손실 값을 VaR로 결정합니다.
    • 장점: 매우 유연하여 복잡한 포트폴리오나 비정규 분포, 비선형적 상품(옵션 등)의 위험도 잘 측정할 수 있습니다.
    • 단점: 계산량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합니다. 시뮬레이션 결과는 어떤 수학적 모델과 가정을 사용했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Garbage in, garbage out’). 모델 자체의 위험(Model Risk)이 큽니다.

결국 어떤 계산 방식을 선택하든 장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쓰느냐 자체가 또 다른 위험(모델 리스크)을 내포하는 셈입니다. 하나의 방법만 맹신하기보다는 여러 방법을 비교하거나 보완적으로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해 보입니다.

VaR의 그림자: 치명적 단점과 보완책 (The Shadow of VaR: Critical Drawbacks and Complements)

VaR는 위험을 하나의 숫자로 보여준다는 간결함 덕분에 널리 쓰이지만, 치명적인 단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 모르고 VaR 숫자만 믿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 꼬리 위험(Tail Risk)에 대한 무지: VaR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99% VaR가 100억이라고 할 때, 나머지 1% 확률로 발생하는 손실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101억일 수도 있지만, 1000억,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즉, VaR 임계치를 넘어섰을 때 상황이 얼마나 심각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못합니다. 2008년 금융 위기 때 많은 금융기관들이 VaR 기준은 충족했지만 상상 이상의 손실을 입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 분산투자 효과 왜곡 가능성 (Not Subadditive): 기술적인 문제지만 중요합니다. 때로는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합친 포트폴리오의 VaR가 개별 자산 VaR의 합보다 더 커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분산투자의 기본 원칙과 상반되는 결과라 문제입니다.
  • 가정과 데이터 의존성: 앞서 보았듯, VaR 계산은 특정 가정(정규분포, 과거 반복 등)과 데이터 품질에 크게 의존합니다. 가정이 틀리거나 데이터가 부족하면 VaR 값 자체가 왜곡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대표적인 지표가 CVaR(Conditional VaR) 또는 **ES(Expected Shortfall)**입니다.

  • CVaR / ES 정의: “만약 손실이 VaR 임계치를 넘어서는 최악의 상황(예: 상위 1% 손실)이 발생한다면, 그때 예상되는 평균 손실 금액은 얼마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 장점: VaR가 알려주지 않는 ‘꼬리 위험’의 심각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즉, 일단 VaR를 넘어서면 평균적으로 얼마나 더 손해를 볼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분산투자 효과를 제대로 반영(Subadditive)합니다.
  • 최근 동향: CVaR/ES는 VaR보다 더 보수적이고 합리적인 위험 지표로 인정받아, 바젤 은행 감독 위원회 등 금융 규제 기관에서도 시장 리스크 자기자본 규제 등에 점차 ES 사용을 강조하는 추세입니다.

이 외에도 특정 위기 상황(예: 주가 30% 폭락, 금리 2% 급등)을 가정하고 손실 규모를 측정하는 **스트레스 테스트(Stress Testing)**나 시나리오 분석 등도 VaR를 보완하는 중요한 위험 관리 도구입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VaR는 위험 관리의 ‘시작점’은 될 수 있지만, 결코 ‘종착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VaR 숫자 하나에 안주하는 것은 마치 폭풍우 속에서 나침반 바늘 하나만 보고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CVaR/ES를 통해 꼬리 위험의 크기를 가늠하고,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해 특정 충격에 대한 내성을 점검하는 등 다각적인 접근이 필수적입니다. 하나의 숫자가 주는 편리함의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금융회사의 위험 관리 현장 스케치 (A Sketch from the Front Lines: Risk Management in Financial Firms)

그렇다면 실제 은행이나 증권사에서는 VaR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요?

  • 리스크 한도 설정: 개별 트레이딩 부서나 상품 운용팀에 하루 또는 일정 기간 동안 초과해서는 안 되는 VaR 한도를 부여하고 이를 모니터링합니다.
  • 자기자본 산정: 금융감독 당국(금융감독원 등)은 바젤 협약 기준에 따라 은행이 보유해야 할 최소 자기자본(위험 대비 자본 비율)을 산정할 때 VaR(또는 점차 ES) 기반의 시장 리스크 측정치를 활용합니다. 즉, VaR가 높을수록 더 많은 자본을 쌓아야 합니다.
  • 성과 평가: 드물지만, 위험을 고려한 성과 평가(Risk-Adjusted Performance) 지표의 일부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 내부 보고 및 공시: 경영진이나 이사회, 그리고 감독 당국에 회사의 전반적인 위험 노출 수준을 보고하는 핵심 지표로 사용됩니다.

현실에서는 시장 리스크 외에도 신용 리스크, 운영 리스크 등 다양한 위험 유형별 VaR를 측정하고 이를 통합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집니다 (물론 위험 통합 자체도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금융기관들은 복잡한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수많은 계량 분석가(Quant)들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VaR가 규제 기준 등으로 제도화되면서 오히려 ‘숫자 맞추기’에 급급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VaR 모델이 잘 잡아내지 못하는 숨겨진 위험(예: 유동성 위험, 복잡한 파생상품 위험)을 감수하면서 VaR 한도만 지키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게임’하려는 유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규제 당국과 금융기관 스스로 모델의 한계를 끊임없이 인지하고 보완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마무리하며

VaR는 금융기관이 직면한 복잡한 위험을 하나의 숫자로 압축하여 소통하고 관리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도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편리한 숫자 뒤에는 위험한 ‘단순화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극단적인 위기 상황(꼬리 위험)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금융 시장의 불확실성 속에서 VaR는 유용한 참고 지표가 될 수 있지만, 결코 절대적인 해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CVaR/ES, 스트레스 테스트 등 보완적인 도구들과 함께, 모델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는 비판적 사고와 건전한 내부 통제, 그리고 때로는 숫자를 넘어서는 통찰력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리스크 관리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숫자에 현혹되지 않고 숫자를 지배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